8.11.21

버스를 놓쳤다

늦은 점심 오후 4시 마라탕을 먹고, 5시 20분쯤 시내버스를 타러 나갔다.  보통 배차간격 까지 생각에서 30분 정도를 계산해둔다. 예약버스시간은 6시였고 5시 30분이 되자 조금 초조해졌다. 배차간격이 5분짜리 버스인데 이리도 안 오다니... 35분 안되겠다 싶어 택시를 타려고 마음 먹은 순간 전광판에 전전정류장이라는 글씨가 보였다. 그래 믿어보자! 했지만... 전전정류장에서 5분을 넘게 멈춰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5시 40분 극적으로 버스에 탑승했고 가는 길에 서른번 정도는 시간을 확인했다. 5시 59분 버스에서 내렸고 전속력으로 터미널까지 달려갔다. 6시 2분 버스가 있어야할 공간은 횡했다. 수수료로 3800원을 냈다. 차라리 이돈으로 택시를 탈걸. 

다음 차 까지는 한시간 반 정도가 남아있었다. 허탈한 마음으로 근처 백화점을 구경했다. 향수도 맡아보고 스파브랜드 옷들도 구경했다. 문득 교보문구가 생각났다. 교보문구까지 가는 길은 꽤나 미로 같았는데, 이 미로같은 구조가 백화점이 나에게 거는 상술같다는 생각이 너무 들어 살짝 미워졌다.  굉장히 상술적으로 배치된 옷가게들을 뚫고 교보문구에 도착했다. 원래 사려던 영어교재를 하나 사고 수필집이 있는 코너로 갔다. 굉장히 심플한 디자인의 책이 눈에 띄었다. 제목은 기억이 안 나는데 흰배경에 책 제목만 적혀있었다. 내용은 어디서 많이 볼 법한 그런 뻔하디 뻔한 산문집이었다. 독서 쪽에 있어서 은근히 근본주의, 힙스터 기질이 있어서 이런 류의 책들은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는데 막상 또 읽어보니까 공감도 많이 되고 부끄럽게도 재미있었다. 

한시간정도를 바닥에 앉아 이 책을 읽어댔다. 3분의 2쯤 읽었을 때는 이미 차를 탈 시간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내가 선택하고 읽었던 수많은 책들은 정말 놀라우리만치 그당시 내가 필요했던 무언가를 주었다. 

고3 수능이 끝났을 무렵 이방인, 인간실격이 그랬고 대학교 1학년 시절 쇼펜하우어의 책들, 김승옥의 차나한잔, 달과 6펜스 등등. 운명적으로 읽게 된 오늘 그 짧은 산문집도 나에게 필요한 조그만 부분을 채워주었다. 이것은 필연일까? 아니면 그냥 나의 추상적인 느낌일까? 책은 항상 그대로 있었고 나는 선택할 뿐이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그 책들은 내가 필요했던 소스들을 던져준다. 

인생의 매순간이 전환점이란 문장이 와 닿았다. 짜증스럽게도 버스를 놓쳤고 수수료도 내고, 그런데 그걸 계기로 지금 시기에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읽었다. 인생지사 새옹지마. 어떻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쨌든 놓친 버스에 감사하다! 덕분에 좋은 경험을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