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폴 오스터의 낯선이에게 말 걸기를 잠깐 읽고
힙스터가 되기 위해선 자신이 힙스터임을 부정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힙스터 라는 단어가 나오기 훨씬 이전 부터 보다 넓은 범위의 개념이 존재했는데 그것이 바로 '다다이즘' 이다.
사회 전반에 걸친 문화, 예술, 정치 등 이미 존재하는 것에 대해 거부하고 다른 길로 가는 것.
다다이즘 운동의 초기 주역이었던 발은 시간이 흐르고 다다이즘의 변질과 함께 다다이즘이라는 운동에서 손을 땠다.
이처럼 힙스터라던가 다다이즘이란던가 하는 일종의 주류에서 멀어지려는 움직임. 그 움직임은 기존에 없던 것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기존에 없던 그 '무언가' 또한 자기자신에 의해서 파괴되어야 하는 모순 혹은 딜레마를 견뎌야 한다.
마치 솜사탕을 없애려 물에 넣었지만 그 물은 설탕물이 되어 또 다시 새로운 것이 됐고 설탕물을 다시 없애야 하는 것과 같다.
무엇이 완성이 되었는가는 중요하지 않은가? 결국 무언가를 반대하는데에서 오는 행위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듯 하다.
힙스터의 결말은 대체로 정해져 있다. 주류에서 너무나도 멀어져 마이너한 소수의 무언가가 되어 있는듯 없는듯 세상에서 사라지거나, 그 흐름이 주류와 우연히(혹은 필연히) 맞아 떨어져서 더 이상 힙스러운 것이 아닌 지극히 평범한 것이 되거나.
완전히 잊혀져 아예 생각지도 못하거나, 그땐 그랬지 하고 회상하는 정도의 수준.
뭐가 됐든 결국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중요한 건 현재로서 없던 것을 했다는 시도. 시도 그 자체. 그리고 의미는 시도를 하면서 동시에 생기고 증발된다.
세상엔 과거 혹은 미래는 없다. 시뮬레이션 이론이니 메타우주 이론이니 하는 것은 집어치우고 지금도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개미의 입장에서 생각해봤을 때 세상에는 현재 만이 존재한다.
다다이즘은 오로지 현재에만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등장과 동시에 휘발 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지극히 다다이즘 관점에서 난 생각한다.
가지 않을 여행 계획을 짜는 것 같이 우리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또한 다다이즘적인 관점 밖에서 볼 때의 다다이즘 운동은 다분히 의미가 있다.
다다이즘이 다릏게 변질되어 초현실주의가 나왔 듯이.
어쩌면 모순은 오롯이 운동의 행위자만 느낄 수 있는 특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