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1.21
피 뽑는 건 무서워
오늘 비자 신체검사 때문에 서울에 올라갔다. 나는 병원 문을 열기 전 부터 이미 긴장해 있었는데, 이유는 채혈검사 때문이었다. 병원에 들어가 접수를 하고 나서 부터는 손에 계속해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순서상 채혈검사는 마지막에 위치해있어 끝까지 긴장감을 놓칠 수가 없었다.
결국엔 그 순간이 왔다. 피를 뽑으면 항상 어지러움을 호소하는 나는 잔뜩 겁에 질린 채 말했다. "누워서 뽑아도 될까요?" 간호사분은 아주 친절하시게도 침대가 있는 방으로 옮겨주셨고, 나는 발끝을 세우고 눈을 질끈 감은채로 도축 당하는 소의 심정을 한껏 느꼈다.
호들갑이란 호들갑은 다 떨었지만 실상 별거 없었다. 항상 이런 식이지만, 손에 난 땀이 무색할정도로 귀여운 통증이었다. 내 생각인데 간호사 분이 블라디미르 수준의 피 뽑기 장인임이 틀림없다.
병원을 나오니 오후 3시 반 쯤. 하루 종일 아무 것도 안 먹었던 터라 근처 국밥집을 들렸다. 부산 할머니 국밥이라는 식당이름과는 다르게 매우 깔끔한 인테리어였다. 모름지기 국밥집의 인테리어가 후질 수록 국밥의 맛은 올라가는 법. 때문에 국밥집을 고를 땐 지저분한 인테리어를 찾아다닌다. 여튼 깔끔한 인테리어에 걸맞게 적은 양과... 대기업의 국밥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배를 따닷하게 댑히고, 천안으로 갈까 서울 구경을 더 할까 고민했다. 집에 들어가도 막상 누워서 유튜브만 볼 걸 생각하니 운동겸 가로수길로 향했다. 천안의 버스는 전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고유의 힙스터 전략을 가지고있다. 정류장에서 손님이 직접 나와 손을 흔들지 않으면 절대 멈추지 않는 무소의 뿔 같은 시스템은 천안 버스의 트레이드 마크다. 이런 서부시대 버스환경에서 길러진 나는 서울의 신사적인 버스 앞에서 감동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몬스 침대 같은 안락함! 급정거가 없는 버스라니? 서울 기사님들은 필히 인성테스트 10점만점에 10점일 듯 하다.
2018년도 가로수길에서 알바를 했을 때 이후로 혼자 온 것은 처음이다. 이미 둘러볼 것은 다 둘러봐서 엑기스 편집샵들만 골라 다녀봤다. 드럽게 비싸기만 하고 살 껀 없었다. 괜히 헛걸음질 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 방의 안락한 침대가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여튼 밖에 있으면 돈만 무지막지하게 깨지니까, 방 안에서 유튜브나 보도록 해야겠다.
9.11.21
8.11.21
버스를 놓쳤다
늦은 점심 오후 4시 마라탕을 먹고, 5시 20분쯤 시내버스를 타러 나갔다. 보통 배차간격 까지 생각에서 30분 정도를 계산해둔다. 예약버스시간은 6시였고 5시 30분이 되자 조금 초조해졌다. 배차간격이 5분짜리 버스인데 이리도 안 오다니... 35분 안되겠다 싶어 택시를 타려고 마음 먹은 순간 전광판에 전전정류장이라는 글씨가 보였다. 그래 믿어보자! 했지만... 전전정류장에서 5분을 넘게 멈춰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5시 40분 극적으로 버스에 탑승했고 가는 길에 서른번 정도는 시간을 확인했다. 5시 59분 버스에서 내렸고 전속력으로 터미널까지 달려갔다. 6시 2분 버스가 있어야할 공간은 횡했다. 수수료로 3800원을 냈다. 차라리 이돈으로 택시를 탈걸.
다음 차 까지는 한시간 반 정도가 남아있었다. 허탈한 마음으로 근처 백화점을 구경했다. 향수도 맡아보고 스파브랜드 옷들도 구경했다. 문득 교보문구가 생각났다. 교보문구까지 가는 길은 꽤나 미로 같았는데, 이 미로같은 구조가 백화점이 나에게 거는 상술같다는 생각이 너무 들어 살짝 미워졌다. 굉장히 상술적으로 배치된 옷가게들을 뚫고 교보문구에 도착했다. 원래 사려던 영어교재를 하나 사고 수필집이 있는 코너로 갔다. 굉장히 심플한 디자인의 책이 눈에 띄었다. 제목은 기억이 안 나는데 흰배경에 책 제목만 적혀있었다. 내용은 어디서 많이 볼 법한 그런 뻔하디 뻔한 산문집이었다. 독서 쪽에 있어서 은근히 근본주의, 힙스터 기질이 있어서 이런 류의 책들은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는데 막상 또 읽어보니까 공감도 많이 되고 부끄럽게도 재미있었다.
한시간정도를 바닥에 앉아 이 책을 읽어댔다. 3분의 2쯤 읽었을 때는 이미 차를 탈 시간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내가 선택하고 읽었던 수많은 책들은 정말 놀라우리만치 그당시 내가 필요했던 무언가를 주었다.
고3 수능이 끝났을 무렵 이방인, 인간실격이 그랬고 대학교 1학년 시절 쇼펜하우어의 책들, 김승옥의 차나한잔, 달과 6펜스 등등. 운명적으로 읽게 된 오늘 그 짧은 산문집도 나에게 필요한 조그만 부분을 채워주었다. 이것은 필연일까? 아니면 그냥 나의 추상적인 느낌일까? 책은 항상 그대로 있었고 나는 선택할 뿐이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그 책들은 내가 필요했던 소스들을 던져준다.
인생의 매순간이 전환점이란 문장이 와 닿았다. 짜증스럽게도 버스를 놓쳤고 수수료도 내고, 그런데 그걸 계기로 지금 시기에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읽었다. 인생지사 새옹지마. 어떻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쨌든 놓친 버스에 감사하다! 덕분에 좋은 경험을 했으니까.
3.11.21
망했다
토익1 교양과목은 이러닝 과목에다가 점수도 후한 편이라 인기가 많다. 이번 학기는 워밍업 하는 느낌으로 가볍게 수강신청을 했는데, 이런 복병이 있을 수가 없다. 모두다 나의 불찰로 부터 시작한다. 오늘 아침 YBM에서 카톡이 왔다. 오늘이 마지막 수강날이니 꼭 수강하라는 내용의 문자였다. 나는 그 문자를 보며 묘한 안도감과 정복감이 들었고 혹시 모르니 밤에 확인을 해야지, 하며 막연한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나는 멍청하게도 11월 2일이 아닌 11월 3일에 하는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질러 버렸고(그 재미없던 피시방에서 시간을 쏟지만 않았더라면), 올해 가장 후회되는 사건 1순위로 기꺼이 랭크되었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고작 교양 2학점으로 이런 경험과 교훈을 얻게 됐으니! 이제 다이어리를 꼼꼼히 무엇보다 포스트잇을 쓰는 습관을 들여야겠다.
이 경험이 후에 나의 안전장치가 되기를.... 진심으로 빈다.
ㅅ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