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24

산책

  22년 밴쿠버에 있을 때 얘기다. 주말에 룸메이트도 없고 나 홀로 따분한 오후였다. 따분한 낮에 레몬을 좀 넣은 술을 잔뜩 들이마시고는 신발을 싣고 산책을 나갔다. 산책이라는게 뭐, 대강 비슷하겠지만 목적지는 없고 그냥 발 닿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 

 귀에 꽂은 에어팟에는 노래가 미친듯이 큰 소리로 나오고 있었고 내 산책 경로와 속도는 내 플레이스트에 들어있던 랜덤하게 많은 곡들에 의해 바뀌어갔다. 그때 마침 내가 빠져 있던 Cal Tjader의 'Agua Dulce'라는 앨범이 재생됐고 산책 중에 점점 올라온 취기는 이미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올라왔다.  

 이 앨범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재즈한 무언가와 사이키델릭한 무언가 그리고 아프리카 부족 음악 같은 요소들이 한대 뒤섞여 정신없는 차분함이라는 이상한 감정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난 말 그대로 길을 잃었다. 분명히 수백번도 더 왔다갔다 한 길이었는데 도저히 집으로 가는 길이 어딘지 찾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 와중에 이 앨범은 고막이 찢어져라 연주되면서 정신을 어지럽혔고 나는 순간 정글에 갇혀 길을 해매는 타잔같은 느낌이 들어 무서우면서도 흥분됐다. 발을 한 걸음 디딜 때마다 땅이 꺼져 가는 느낌도 그렇고, 내가 의도한 발걸음 만큼 보다 훨씬 더 내 발은 앞으로 나가있는 이상한 감각도 그렇고 총체적 난국이었다. 

 앨범이 거의 다 끝나가는데 더는 이대로 해매면 안되겠다 싶어, 급하게 핸드폰을 꺼내 지도를 열었다. 지도를 열자 나는 참 웃기게도 내가 집주변을 계속해서 돌고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집 근처에 양 모양 동상 비슷한게 있었는데 그게 얼마나 진짜 처럼 보인던지.   

 다행이도 내가 살던 동네는 굉장히 조용한 동네여서, 내가 푼수같이 해매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