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22

신림동과 가로수길에 관한 짧은 기억 (1)

스무살 여름방학 대학교 1학년

 학기를 끝내고 나는 서울로 올라와 신림동 원룸방에서 자취를 하는 친구와 두어달 간을 함께 같이 보냈다. 그 당시 나에게 군복무는 족쇄이기도 하면서 분명히 사용기한은 정해져 있지만 뒷일 생각할 필요없이 젊음을 한 껏 누릴 수 있게 해주는 놀이공원 자유이용권 이기도 했다. 물론 나는 강남역 바로 옆에 있는 해커스 토익학원을 다닌 다는 대의명분으로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난 무엇보다 서울에서 알바를 하고 싶었는데, 움직이는 것은 또 죽기만큼 싫어하는 나는 집에서 몇키로 떨어져 있지 않은 식당들의 공고에 문자를 날려보곤 했다. 친구가 전에 일하던 두끼 알바 면접을 마지막으로 난 신림동 근처에서 알바 찾기를 그만두었다. 모든 알바자리에 대기명단이 있었고, 자그마한 칼국수집 서빙으로는 경력직만 쓴 다는 얘기를 듣고 화가 나거나 풀이 죽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신림동은 분명 서울이지만 내가 에전부터 상상하던 이상적인 서울의 모습은 아니었고, 쉽게 말해 전국 어디서든지 찾아 볼 수 있는 무언가 조금은 노후되고 시장터 같은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나는 당시 한창 인기있던 유튜브 채널 와썹맨을 보고있었다. 마침 혁오가 그 채널에 출연했는데, 나는 그 영상을 보고 한번도 없는 가로수길에 대한 동정을 품게되었다. 나는 곧장 알바몬에 들어가 가로수길에 있는 알바 자리를 샅샅이 뒤졌다. 세련된 거리에서 일한다는 부푼 마음과 혹시나 한번 쯤은 그곳에서 혁오를 만날 수 있지 않을 까 하는 기대감과 함께. 2018년 당시 최저시급은 7000원대 중반 정도였지만 내 눈에 들어온 공고모집에는 9000원이라는 꽤 높은 시급이 적혀있었다. 떨리지만 무언가 될 것 같은 느낌에 지원서를 보냈고 다음날 면접을 보러갔다. 늘 그렇듯 항상 내겐 필살기 같은 옷들이 있었는데, 면접에서 붙고싶은 마음에 난 슬랙스에 블레이저를 갖추어 입고 그 가게로 향했다. 


 가로수길은 강남역 근처와는 너무나도 다른 느낌이었고 천안에서 온 촌뜨기 스무살은 그 거리에 한번에 매료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합격했다. 내 전공과 이 알바의 교집합을 끊임없이 설명해온 나에게 설득 됐을지 아니면 너무나도 많은 알바생들의 도주에 지친 그 실장의 귀찮음을 이겨내지 못 했는지 모르겠지만. 꽤나 번듯한 레스토랑에(물론 주방이지만) 가로수길 메인 거리에서 내가 일한다니, 몸은 고되었지만 이 거리에서 뿜어지는 매력에 난 오늘 불 앞에서 땀을 몇 방울이나 흘렸는지 셀 필요가 없어졌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노동하진 않았다. 토요일, 일요일만 출근했고 아침 8시 무렵에 출근해 저녁 8시 무렵에 퇴근하는 패턴이었다. 


 덕분엔 주말을 제외한 나머지는 오직 나를 위한 자유시간이었고 난 한 없이 그 시간들을 자연속으로 되돌려 주었다. 오후 1시에 일어나는 것은 기본 소양이었고 라면을 끓려면 한시간 가량을 기다려야 하는 가스렌지 덕택에 습관적 외식을 하곤 했다. 나는 돈을 물 쓰듯 썻지만 왜인지 항상 통장에는 여유분이 남아있었다(부모님 감사합니다).


 내가 첫 출근을 했을 때 그 가게의 실장님은 앞으로 어떤 식으로 일을 해야하는 지에 대해 교육을 해주었고, 그것도 무지 빡세게, 의례 그렇듯 처음왔을 때 흥미가 돋을 법한 가계에 관한 에피소드들을 말해주었다. 대부분은 까먹었는데 아직 하나 기억나는 건 고양이 인형을 어깨에 매달고 오는 단골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손님이 낸시랭이 라는 연예인 아닌 연예인 이라는 별 것 아닌 사실 뿐. 난 속으로 낸시랭 말고 혁오가 여기의 단골이었으면 했다. 그렇지만 난 한번도 낸시랭을 가게에서 본 적이 없다. 아마 평일 단골이었나 보지. 


 가는 길은 그리 가깝지도 그렇다고 부담스러운 거리는 아니다. 도중에 2호선에서 3호선으로 한 번 환승을 해야하지만, 난 그 사이에 서울에서 청춘을 갈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었기에 썩 지루한 출퇴근 길은 아니었다. 알바를 끝내고 식당에서 나올 때면 난 곧장 집으로 향하기 보다는 가로수길 주위를 정처없이 돌아다니곤 했다. 그 사이 꽤 많은 옷들을 입어봤고 팬시한 가게들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때 당시의 나의 옷차림을 보면 부끄럽기 그지 없지만 (지금도 잘 입는 다 자신있게 말 할 순 없지만) 그때 그런 과정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지 싶은 마음이다. 




많은 얘기가 머리속에 아직 있지만 정리가 안 됐고 귀찮으니 다음에 이어서 써야겠다.

20.7.22

예수와 기독교인

존레논이 비틀즈가 예수보다 더 유명하다고 발언 했을 때

그 당시 기독교인이 취했어야 할 자세는 무엇이었을까?

배척하고 공격하는 것?

혹은 잘 못된 점을 잡아주고 포용해주는 것?

예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


내가 아는 한 예수는 존 레논을 용서했으리라.


까만 밤에 붉은 십자가는 왜이리 또 많은지 예수님은 시력이 별로 좋지 않았나, 혹은 기독교인들의 일방적인 구애였나.

다들 알다시피 우리 나라에는 너무나도 많은 숫자의 십자가가 밤을 장식하지만, 정작 밤에 일어나는 일들은 그리 구원적이지 않다. 

십자가의 숫자에 비례해 정말 예수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왜이리도 적을까?


예수는 경고를 했을 지는 몰라도 혐오와 공격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은 안타깝기 그지 않다. 


부처님이든 예수님이든 알라신이든 모든 종교에 존중을 가지고 있다. 

종교는 많은 사람들을 죽이기도 했지만 또한 살리기도 했으니, 

모든 종교의 본질, 그 본질의 공통점이라면 내 생각엔 "사랑" 뿐이다. 


사랑하는 것 보다 미워하는 게 더 쉬운 길인 걸 알지만 결국엔 가면 꼬일 대로 꼬여서 복잡해지기만 한다.

생각해보면 사랑하는 것도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다. 


사실 어렵다..

19.7.22

부모자식

 많은 행복들이 있겠다. 

청춘의 행복, 큰 성취의 행복, 부터 해서 자잘한 의식주의 해소에서 오는 행복까지

모든 행복은 ‘찰나’ 라는 공통점이 있다. 

단 하나 중간에 쉼은 있어서 결코 마감기한은 없는(또한 찰나도 아닌) 부모자식간에서 오는 행복

젊은 남녀 둘이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인생의 일부를 내어줄 각오로 만들어진 그 관계속의 행복

그런 행복은 정말이지 그 이상의 행복이 있다고 그 누가 말할 수 있을까?

되려 난, 나를 위한 그들의 큰 희생의 작은 일부라도 보답할 수 있을까.



신해철

영국엔 존 레논 미국에는 비기 스몰즈 한국엔 신해철 모두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뮤지션들이다. 공통점이 있다면 이들의 본업인 음악을 끝내주게 했다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단명 했다는 점이다. 나는 오늘 신해철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다. 이미 비기와 존 레논에 대한 나의 찬양은 수 없이 많이 했기에 더 할 얘기가 없어진 것도 이유이겠다. 

 사회운동가이면서 뮤지션 대표적으로는 존 레논,  사실 대중예술가가 사회운동에 참여한 경우는 수도 없이 많고 지금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분명 신해철의 다른 점이라면 '똑똑함' 이다. 구멍이 없는 논리가 세상에 어디 있겠냐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논리는 자그마한 쥐구멍 조차 찾기가 힘들다. 그가 토론에 나와서 방송에 나와서 했던 말들은 항상 예리 했고 분명한 선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것들이 결국 미숙한 사회에 받아들여지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는 사회를 질책하기에 앞서 자기 표현방식의 오점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는 많은 상황에서 진실을 말해왔다. 90년대 이전부터 그가 죽기 전까지, 그가 했던 말에는 당시에는 민감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논재들이 이제는 너무나도 당연시 된 것도 있고,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것들도 있다. 시간이 흘러서는 늘 그렇듯 그의 날카로운 단어들이 더 이상 삐딱하게 느껴지지 않고 보편적인 상식이 될 것이다(가령 학생체벌 처럼).

한국 사회 속에서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정말이지 꽉 막힌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 대화를 하기도 할 의지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마다 그가 쓴 글이나 영상을 보면 한국에도 이런 사람이 있구나, 심지어는 대중매체에 나와서도 이렇게 용기있게 하는 사람이 있구나 하며 위안을 느끼는 동시에 아쉬움이 커진다. 

그렇기에 그의 죽음이 실로 안타깝다. 스마트하게 동시에 방향을 잃지 않는 직선적인 그의 사상들이 아직 까지 우리 사회에(특히 한국) 필요함을 절실히 느낀다. 

신해철이 지금도 살아있다면 과연 어떤 말들을 또 전했을까?

수많은 혐오와 갈등속에서 허우적 거리는 한국에서 신해철은 분명히 선을 제시했을 거라고 믿는다. 

나는 세상이 이랬으면 좋겠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사후에 천국에 가면 좋겠고,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열반에 올랐으면 한다. 나는 무교이기 때문에 죽으면 그냥 그걸로 끝이었으면 한다. 신해철 또한 생전에 무교였으니 내가 나중에 죽는 다고 한들 만날 수 없겠지만, 그래도 그속에서 신해철이 무한히 행복하길 빌뿐이다. 자그마한 소원이 있다면 꿈에서 든지 사후에서 든지 잠깐이라도 대화를 해보고 싶다. 

* 음악에 조금이라도 진심인 음악가들이라면 자신의 마지막 앨범을 장식하기 위해 그동안 아껴놓은 곡들, 작법들, 가사들이 있을 텐데 그 계획을 끝내 이행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신해철을 생각하면 정말로 마음이 아프지만 누구보다 현명했던 그는 오히려 훌훌 털고 떠났을 것이다. 뮤지션이자 사회운동가, 그 누구보다 뛰어났던 논객 신해철님의 명복을 진심으로 빈다.

17.7.22

22년 7월 16일

 친구가 비행기를 놓쳐 어쩔 수 없이 함께 하게 된 나머지 약 5일 정도를 더해 대략 한달 정도를 천안에서 온 친구와 함께 했다. 친구가 우버를 타고 공항으로 간 후 다시 또 조용해진 집 안을 보니 외로워짐과 동시에 집이 괜시리 깔끔해 보이는 기분도 들었다. 이제 다시 가다듬고 약 한달간의 붕떠있는 기분을 식혀야겠다.

 그리고 조만간 뉴욕에서 있었던 일들을 글로 적어낼 생각이다. 그리 특별한 사건들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확실히 낭만있던 순간들은 있었다. 거기서 만났던 낯선 사람들과의 대화들을 시간이 지나 까먹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글이 이쁘지 않더라도 그 목적만 달성하면 만족할 듯 싶다.

 옷장정리도 다 했고, 빨래도 돌려놨고, 설거지도 다했다. 별 것 아닌 집안일을 마치고 나면 왜인지 자유로워진 기분이 든다. 그리고 난 중국식 라면 끓여놨어.